Scholar Interview 04 / Anxiety, Faith and New Being

Paul Tillich

신은 하나의 존재자인가, 존재의 근거인가. 궁극적 관심과 상징, 불안과 용기, 소외와 새로운 존재를 12개의 문답으로 읽는다.

Scholar 04

폴 틸리히

틸리히는 철학과 신학, 교회와 문화, 유럽과 미국의 경계에서 사유했다. 실존이 제기하는 질문과 기독교 상징의 응답을 상관시키며, 신을 세계 안의 최고 존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깊이로 말하려 했다.

주요 저작
『조직신학』 · 『존재의 용기』
핵심 문제
불안 · 상징 · 소외
사유의 형식
경계 · 상관 · 해석

Chapter I · Faith and Being

궁극적 관심과 신

신앙을 교리 동의보다 인간 전체를 붙드는 궁극적 방향으로 이해하고, 종교 언어의 상징적 성격을 묻는다.

Paul

『신앙의 역동성』

신앙을 교리 동의가 아니라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로 정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앙은 증거가 부족한 명제에 억지로 동의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를 하나로 모아 어떤 것을 궁극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궁극적 관심을 위해 다른 관심을 희생하고, 그것에서 삶의 의미와 존재의 약속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없는 사람도 궁극적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국가, 성공, 계급, 과학이 무조건적 헌신을 요구하면 종교적 기능을 합니다. 문제는 관심의 강도가 아니라 유한한 대상을 궁극적인 것으로 높여 우상화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인간을 붙드는 궁극적인 것에 붙들렸다는 경험이며, 자기 확신의 업적이 아닙니다.

이 정의는 루터교 목사의 가정에서 배운 신앙을 버린 결과가 아니라, 두 차례의 역사적 붕괴를 통과하며 다시 해석한 결과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군목으로 참호와 야전병원에서 죽음을 마주했을 때 제국, 교회, 도덕적 진보가 서로를 보증하던 세계는 무너졌습니다. 이어 바이마르기의 정치투쟁과 망명은 인간이 종교 기관 밖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궁극화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종교적 문장의 수락으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의 삶 전체가 무엇에 무조건적으로 붙들려 있는지를 드러내는 존재의 중심 문제로 재정의했습니다.

Paul

『조직신학』 I

상관의 방법은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맞춰 기독교 메시지를 변형하는 타협이 아닙니까?

상관의 방법은 인간 실존이 철학, 예술, 심리학에서 표현하는 질문을 분석하고 기독교 메시지의 상징이 어떻게 응답하는지 보여 줍니다. 답을 이해하려면 질문을 알아야 하며, 질문을 깊이 이해하려면 답이 드러내는 인간 조건도 필요합니다. 둘은 서로를 해석하지만 같은 원천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신학이 문화의 욕구에 맞춰 메시지를 제조한다면 계시의 비판적 힘은 사라집니다. 반대로 인간의 실제 질문을 듣지 않고 전통 문장만 반복하면 답은 의미 없는 소리가 됩니다. 상관은 타협이 아니라 두 극을 유지하는 작업입니다. 실존은 답을 생산하지 못하고, 메시지는 질문을 무시한 채 전달될 수 없습니다.

이 방법은 전후 베를린에서 철학, 정신분석, 표현주의 예술, 사회주의 운동을 신학의 대화 상대로 삼았던 경험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철학과 신학, 교회와 세속 문화, 유럽과 미국의 경계에서 사유했고, 어느 한쪽의 언어를 다른 쪽에 그대로 강요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상관은 모든 질문에 기독교 문장을 하나씩 배정하는 표가 아닙니다. 실존 분석은 유한성·소외·무의미라는 질문의 깊이를 드러내고, 기독교 메시지는 그 질문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동시에 질문의 전제도 비판합니다.

Paul

『조직신학』 I · II

신을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 또는 ‘존재의 근거’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을 세계 안에서 가장 강하고 오래된 존재자로 놓으면, 그 존재를 설명할 더 큰 범주가 필요해집니다. 그런 신은 무신론이 부정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며 결국 유한한 우상이 됩니다. 나는 신을 존재 자체, 존재의 근거와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존재자는 그 근거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합니다.

이 언어가 성서의 인격적 신을 지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와 만남의 인격적 상징은 필수적이지만, 신을 인간과 같은 하나의 인격으로 문자화해서는 안 됩니다. 신은 인격 이하가 아니라 인격성의 근거입니다. 존재론적 언어와 인격적 상징은 서로를 교정해야 하며 어느 하나도 신의 실재를 포괄하지 못합니다.

이 존재론적 어휘는 젊은 시절 셸링을 연구하며 형성되었고, 키르케고르와 실존철학을 만난 뒤 유한한 존재의 불안과 연결되었으며, 망명 이후 『조직신학』에서 체계화되었습니다. 저는 초자연적 세계에 거주하는 최고 인격을 상정한 뒤 그 존재 여부를 다투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공통 전제를 문제 삼았습니다. 존재의 근거는 사물들의 목록에 하나를 더하는 설명이 아니라, 어떤 것이 무의 위협 속에서도 존재하며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하는 깊이를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신에 대한 질문은 “그가 어디에 있는가”보다 “존재가 어떻게 우리를 붙들고 있는가”로 전환됩니다.

Paul

『신앙의 역동성』 · 『조직신학』 I

종교 언어가 상징이라면 그것은 단지 주관적 비유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궁극적 실재에 참여합니까?

상징은 임의로 정한 표지와 다릅니다. 국기가 공동체의 힘에 참여하듯 종교 상징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에 참여하고, 평소 닫혀 있던 현실과 영혼의 차원을 엽니다. 창조주, 아버지, 왕, 사랑이라는 말은 신을 사진처럼 묘사하지 않지만 우리의 존재 관계를 실제로 드러냅니다.

상징은 생겨나고 죽으며 문자화될 때 우상이 됩니다. 그러나 “신은 존재 자체다”라는 말까지 포함해 상징이 아닌 안전한 인간 언어는 없습니다. 상징적이라는 말은 거짓이나 장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언어가 무한한 것을 참되게 가리키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상징은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향해야 합니다.

저는 전후 독일의 미술과 문학을 해석하면서 상징이 단순한 교리의 삽화가 아니라 현실의 감추어진 깊이를 열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십자가나 창조 같은 상징은 개인이 임의로 발명해 교체하는 암호가 아니라 공동체의 역사에서 생겨나 인간의 무의식과 존재 이해를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상징은 자신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것과 동일하지 않으므로 비판과 소멸의 가능성을 품습니다. 상징의 참여를 인정하는 일과 상징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일은 함께 가야 하며, 이 긴장이 종교 언어를 공허한 은유와 문자적 우상화 모두에서 지켜 줍니다.

Chapter II · The Courage to Be

불안과 존재의 용기

죽음, 죄책, 무의미의 위협을 병리로만 다루지 않고 유한한 존재의 구조로 분석한다.

Paul

『존재의 용기』 I–II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와 현대의 붕괴를 경험한 뒤, 공포와 불안을 어떻게 구별하게 되었습니까?

공포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질병이나 적을 두려워하면 그것을 피하거나 맞설 수 있습니다. 불안은 존재 자체가 비존재의 위협을 의식할 때 생기며, 정확한 대상이 없기 때문에 어디로 행동해야 할지 알기 어렵습니다. 불안은 유한한 존재가 자기 유한성을 아는 방식입니다.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는 그것을 공포의 대상으로 바꾸거나 억압하기 쉽습니다. 병리적 불안은 치료가 필요하지만 존재론적 불안은 인간 조건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용기는 불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불안을 자기 안에 받아들이면서도 존재를 긍정하는 행위입니다. 치료와 신학은 이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 구별은 책상 위의 심리 분류가 아니었습니다. 전쟁터에서 특정한 포탄과 부상은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익숙한 세계 전체가 붕괴하고 내가 우연히 존재한다는 감각은 제거할 수 없는 더 근원적인 불안이었습니다. 전쟁 뒤 독일 사회의 급진화와 1933년의 추방은 그 경험을 역사적으로 반복시켰습니다. 미국에서 쓴 『존재의 용기』는 실존철학과 임상심리학의 언어를 빌리되, 불안을 단지 치료할 증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유한한 존재가 비존재를 의식하는 구조로 해석한 결실입니다.

Paul

『존재의 용기』 II

죽음·죄책·무의미의 세 불안은 인간의 유한성과 서구 역사의 변화를 어떻게 함께 보여 줍니까?

운명과 죽음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공허와 무의미는 영적 의미를, 죄책과 정죄는 도덕적 자기 긍정을 위협합니다. 세 형태는 모든 시대에 있지만 특정 시대가 하나를 더 강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대는 운명, 중세는 죄책, 현대는 무의미의 불안이 두드러집니다.

이 구분은 역사를 세 칸으로 단순화하려는 도식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삶의 의미를 잃고 자신을 정죄할 수 있듯 세 불안은 얽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표면적 증상 아래 어떤 비존재의 위협이 작동하는지 묻는 일입니다. 적절한 용기는 위협을 부정하지 않고 그 깊이에 상응해야 합니다.

세 유형은 신체적 존재, 도덕적 자기 긍정, 영적 의미라는 인간의 서로 다른 차원을 보여 줍니다. 고대의 운명 의식, 중세의 죄책 의식, 근대 말의 무의미 경험이라는 역사적 강조는 각 시대가 나머지 불안을 몰랐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지탱하던 상징과 제도가 어디서 흔들렸는지를 보여 주는 진단입니다. 특히 현대인은 전통적 권위에서 해방된 만큼 왜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는 부담을 집니다. 신학의 과제는 과거의 죄책 언어를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의미의 깊이에서도 존재를 긍정하게 하는 근거를 해명하는 것입니다.

Paul

『존재의 용기』 IV–V

공동체에 참여할 용기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용기는 왜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충돌합니까?

‘부분으로 존재할 용기’는 공동체, 전통, 집단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합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용기’는 집단의 획일성에 저항해 고유한 인격을 긍정합니다. 하나만 절대화하면 집단주의는 개인을 삼키고, 개인주의는 자신을 지탱하는 관계를 잊습니다.

건강한 용기는 참여와 개별화를 함께 필요로 합니다. 나는 공동체가 만든 언어와 역사 없이 내가 될 수 없지만, 공동체의 우상에 자신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두 용기의 긴장은 더 깊은 존재의 근거에 참여할 때 견딜 수 있습니다. 궁극적 긍정은 집단이나 고립된 자아 어느 쪽도 궁극화하지 않습니다.

이 긴장은 제 정치적·개인적 여정에서도 구체적이었습니다. 전후 종교사회주의 운동은 개인의 구원을 사회 구조와 분리할 수 없다는 통찰을 주었지만, 민족과 계급이 절대화될 때 공동체는 인격을 삼킵니다. 반대로 망명자의 자유와 미국적 개인주의는 창조성을 열어 주면서도 역사적 소속을 잃은 고립을 낳을 수 있었습니다. 존재의 용기는 두 극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중용이 아니라, 공동체에 참여하면서 그 공동체를 비판하고 홀로 서면서도 관계에 빚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역동적 자기 긍정입니다.

Paul

『존재의 용기』 VI

전통적인 유신론의 신이 무너진 뒤에도 남는 ‘신 위의 신’과 절대적 신앙은 무엇입니까?

무의미와 의심이 전통적 유신론의 신까지 무너뜨릴 때, 사람은 자신이 믿어 온 대상과 함께 절망할 수 있습니다. ‘신 위의 신’은 더 높은 두 번째 신을 뜻하지 않습니다. 대상화된 신의 이미지가 붕괴한 자리에서도 우리를 받아들이는 존재의 근거를 가리키는 역설입니다.

절대적 신앙은 의심을 제거한 확실성이 아니라 의심과 무의미를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내가 신을 붙드는 힘보다 내가 받아들여졌다는 근원적 경험이 먼저입니다. 이 표현은 교리와 공동체를 무용하게 만들지 않지만, 어떤 교리적 형식도 궁극적인 것 자체가 될 수 없다는 비판을 남깁니다.

여기서 “위”는 존재자의 서열을 뜻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들어주는 초월적 인격을 하나의 객관적 대상으로 상상한 뒤 그 상이 설득력을 잃을 때, 그 붕괴를 곧 존재의 근거 자체의 부재로 단정하지 말라는 표현입니다. 절대적 신앙은 증명에 실패한 뒤 남는 막연한 감정도, 절망을 영웅적으로 견디는 인간의 업적도 아닙니다. 의미를 보장하던 모든 상징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자신이 존재 자체에 의해 수용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건이며,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신 관념까지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급진적 자기비판을 포함합니다.

Chapter III · Estrangement and New Being

소외와 새로운 존재

죄를 소외로 해석하고, 그리스도·문화·프로테스탄트 원리가 유한한 형식을 어떻게 심판하고 새롭게 하는지 묻는다.

Paul

『조직신학』 II

죄를 개별적인 도덕 위반보다 ‘소외’로 해석할 때 인간의 책임과 구원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집니까?

죄는 개별 규칙 위반의 합보다 깊습니다. 인간이 존재의 근거, 타인,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스스로 중심이 되려는 상태입니다. 불신앙, 교만, 욕망은 이 소외의 서로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것에서 실존적으로 멀어져 있습니다.

소외라는 말이 책임을 사회 구조나 심리 상태로 희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외는 보편적 조건이지만 각 사람의 자유로운 행위 속에서 현실화됩니다. 동시에 도덕적 노력만으로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비극적 깊이를 갖습니다. 구원은 나쁜 행동 몇 개를 지우는 것보다 깨어진 관계와 존재의 중심이 새로 통합되는 일입니다.

이 해석은 창조와 타락을 먼 과거에 연속해서 일어난 두 사건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의 본질과 실존 사이의 현재적 간극으로 읽으려는 시도입니다. 인간은 존재의 근거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절대적 중심으로 세우고, 자유를 통해 그 분리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죄에는 피할 수 없는 조건의 비극성과 구체적 선택의 책임이 동시에 있습니다. 도덕 훈련은 필요하지만 소외 전체를 제거할 수 없으며, 구원은 벌의 면제만이 아니라 신·타인·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새로운 중심 안에서 화해되는 존재론적 치유를 뜻합니다.

Paul

『조직신학』 II · 『새로운 존재』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고전적 기독론을 실존 철학으로 대체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본질과 실존의 분열, 신과 인간의 소외가 극복된 삶이 나타났다고 봅니다. ‘새로운 존재’는 낡은 세계에 초자연적 물체가 추가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소외를 이기고 관계를 회복하는 존재 방식이 역사 안에 현실화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교리적 칭호를 반복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종교적·정치적 권력이 그를 소유하려는 시도를 부정하고, 부활의 상징은 소외와 죽음이 최종 권세가 아님을 표현합니다. 구원은 그 새로운 존재에 참여하여 용서받고 화해하며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조직신학』 제2권에서 이 용어는 칼케돈 교리를 폐기하기보다 그 실존적 의미를 되살리려는 시도입니다. “참된 신과 참된 인간”이라는 공식은 두 물질이 한 인물 안에 결합했다는 설명이 아니라, 유한성이 신적 근거와 결합하면서도 소외로 떨어지지 않은 삶을 가리켜야 합니다. 예수의 구체적 역사성은 규범이지만, 그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은 그 역사 안에서 소외를 이긴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는 신앙의 판단입니다. 교리의 목적은 형이상학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그 새로운 존재에 참여해 실제로 화해되고 변화될 가능성을 말하는 데 있습니다.

Paul

『프로테스탄트 시대』

프로테스탄트 원리는 교회·국가·교리 체계가 스스로를 절대화할 때 어떤 비판을 수행합니까?

프로테스탄트 원리는 유한한 어떤 것도 궁극적 지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예언자적 항의입니다. 교회, 성서 해석, 국가, 지도자, 교리 체계가 자신을 신적 진리와 동일시할 때 이 원리는 우상화를 폭로합니다. 종교개혁의 한 교파가 소유한 표어가 아니라 모든 종교 형식을 향한 기준입니다.

그러나 항의만 남으면 공동체와 상징을 세울 수 없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원리에는 그것을 표현하는 가톨릭적 실체, 곧 예배·전통·성례·제도가 필요합니다. 형식 없는 궁극성은 공허하고, 비판 없는 형식은 우상이 됩니다. 교회는 진리를 소유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진리의 심판 아래 있음을 고백할 때 표지가 됩니다.

이 원리는 나치즘에 대한 제 정치적·신학적 저항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종교사회주의자로 활동하던 저는 민족과 지도자를 궁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했고, 1933년 대학 직위를 잃고 독일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칼날은 국가에만 향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자기 교리와 제도를 신의 무조건적 진리와 동일시할 때에도 같은 우상화가 일어납니다. 프로테스탄트 원리는 종교개혁을 영구히 승리한 사건으로 기념하는 표어가 아니라, 모든 유한한 성취와 자기 자신을 계속 심판하는 원리입니다.

Paul

『문화의 신학』

문화가 종교의 바깥이 아니라 종교의 깊이를 드러내는 장소라면, 신학자는 예술과 정치에서 무엇을 읽어야 합니까?

종교는 문화의 한 구역이 아니라 문화가 가진 깊이의 차원입니다. 예술, 정치, 과학, 일상은 각각 무엇을 궁극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지 드러냅니다. 그래서 겉으로 종교적인 작품이 깊이를 잃을 수 있고, 세속적 예술이 인간의 궁극적 질문을 더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문화의 신학은 모든 문화를 기독교 교리의 예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작품과 제도의 고유한 형식을 존중하면서 그 안의 궁극적 관심과 우상, 소외와 희망을 해석합니다. 교회는 문화 밖의 안전지대가 아니라 같은 시대의 질문 안에 있습니다. 신학은 경계에 서서 문화의 질문을 듣고, 그 질문을 넘어서는 깊이를 증언해야 합니다.

이 관점은 1920년대 베를린의 강의와 예술 비평에서 시작되어 미국의 대학과 교회에서 더 넓어졌습니다. 표현주의 회화는 표면의 조화를 깨뜨려 존재의 불안과 깊이를 드러냈고, 정치 운동은 정의에 대한 열망과 유한한 이념의 우상화를 동시에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이를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고 종교는 문화의 깊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신학자는 작품을 교리의 암호로 해독하지 않고, 한 시대가 무엇을 궁극적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희망하는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문화와 대화할 때 신학도 자기 언어가 살아 있는 질문에 응답하는지, 아니면 과거의 형식만 보존하는지 시험받습니다.

Inquiry Lab · Scholar 04

존재의 근거를 정치·기술·종교 다원성 앞에서 검증하기

셸링의 유산, 종교사회주의, 기술 문화, 그리스도와 다른 종교의 관계를 통해 상관의 방법이 감당해야 할 가장 강한 반론을 설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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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s Interview 02

『신앙의 역동성』

궁극적 관심, 신앙과 의심, 상징과 신화, 우상적 신앙과 종교적 진리의 충돌을 12개의 심층 문답으로 읽는다.

『신앙의 역동성』 인터뷰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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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목소리를 함께 읽기

내면, 존재, 실존, 언어는 서로 다른 시대의 문제가 아니다. 네 인터뷰를 오가며 같은 질문이 어떻게 다른 문법을 얻는지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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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Note

이 문답은 실제 인터뷰가 아니라 『조직신학』, 『존재의 용기』, 『신앙의 역동성』, 『문화의 신학』과 주요 연구를 바탕으로 구성한 편집적 재구성이다. 일인칭 답변은 직접 인용이 아니며, 상관의 방법, 존재 자체로서의 신, 상징과 새로운 존재에 제기된 비판을 틸리히의 최종 교리처럼 단순화하지 않았다. 첫 화면 이미지는 사용자가 제공한 시안 자산이며 공개·상업적 사용에는 원작 이미지 권리 확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