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I · Faith and Being
궁극적 관심과 신
신앙을 교리 동의보다 인간 전체를 붙드는 궁극적 방향으로 이해하고, 종교 언어의 상징적 성격을 묻는다.
Paul
『신앙의 역동성』
신앙을 교리 동의가 아니라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로 정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앙은 증거가 부족한 명제에 억지로 동의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를 하나로 모아 어떤 것을 궁극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궁극적 관심을 위해 다른 관심을 희생하고, 그것에서 삶의 의미와 존재의 약속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없는 사람도 궁극적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국가, 성공, 계급, 과학이 무조건적 헌신을 요구하면 종교적 기능을 합니다. 문제는 관심의 강도가 아니라 유한한 대상을 궁극적인 것으로 높여 우상화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인간을 붙드는 궁극적인 것에 붙들렸다는 경험이며, 자기 확신의 업적이 아닙니다.
이 정의는 루터교 목사의 가정에서 배운 신앙을 버린 결과가 아니라, 두 차례의 역사적 붕괴를 통과하며 다시 해석한 결과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군목으로 참호와 야전병원에서 죽음을 마주했을 때 제국, 교회, 도덕적 진보가 서로를 보증하던 세계는 무너졌습니다. 이어 바이마르기의 정치투쟁과 망명은 인간이 종교 기관 밖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궁극화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종교적 문장의 수락으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의 삶 전체가 무엇에 무조건적으로 붙들려 있는지를 드러내는 존재의 중심 문제로 재정의했습니다.
Paul
『조직신학』 I
상관의 방법은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맞춰 기독교 메시지를 변형하는 타협이 아닙니까?
상관의 방법은 인간 실존이 철학, 예술, 심리학에서 표현하는 질문을 분석하고 기독교 메시지의 상징이 어떻게 응답하는지 보여 줍니다. 답을 이해하려면 질문을 알아야 하며, 질문을 깊이 이해하려면 답이 드러내는 인간 조건도 필요합니다. 둘은 서로를 해석하지만 같은 원천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
신학이 문화의 욕구에 맞춰 메시지를 제조한다면 계시의 비판적 힘은 사라집니다. 반대로 인간의 실제 질문을 듣지 않고 전통 문장만 반복하면 답은 의미 없는 소리가 됩니다. 상관은 타협이 아니라 두 극을 유지하는 작업입니다. 실존은 답을 생산하지 못하고, 메시지는 질문을 무시한 채 전달될 수 없습니다.
이 방법은 전후 베를린에서 철학, 정신분석, 표현주의 예술, 사회주의 운동을 신학의 대화 상대로 삼았던 경험에서 자랐습니다. 저는 철학과 신학, 교회와 세속 문화, 유럽과 미국의 경계에서 사유했고, 어느 한쪽의 언어를 다른 쪽에 그대로 강요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상관은 모든 질문에 기독교 문장을 하나씩 배정하는 표가 아닙니다. 실존 분석은 유한성·소외·무의미라는 질문의 깊이를 드러내고, 기독교 메시지는 그 질문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동시에 질문의 전제도 비판합니다.
Paul
『조직신학』 I · II
신을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 또는 ‘존재의 근거’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을 세계 안에서 가장 강하고 오래된 존재자로 놓으면, 그 존재를 설명할 더 큰 범주가 필요해집니다. 그런 신은 무신론이 부정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며 결국 유한한 우상이 됩니다. 나는 신을 존재 자체, 존재의 근거와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존재자는 그 근거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합니다.
이 언어가 성서의 인격적 신을 지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와 만남의 인격적 상징은 필수적이지만, 신을 인간과 같은 하나의 인격으로 문자화해서는 안 됩니다. 신은 인격 이하가 아니라 인격성의 근거입니다. 존재론적 언어와 인격적 상징은 서로를 교정해야 하며 어느 하나도 신의 실재를 포괄하지 못합니다.
이 존재론적 어휘는 젊은 시절 셸링을 연구하며 형성되었고, 키르케고르와 실존철학을 만난 뒤 유한한 존재의 불안과 연결되었으며, 망명 이후 『조직신학』에서 체계화되었습니다. 저는 초자연적 세계에 거주하는 최고 인격을 상정한 뒤 그 존재 여부를 다투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공통 전제를 문제 삼았습니다. 존재의 근거는 사물들의 목록에 하나를 더하는 설명이 아니라, 어떤 것이 무의 위협 속에서도 존재하며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하는 깊이를 가리킵니다. 그렇기에 신에 대한 질문은 “그가 어디에 있는가”보다 “존재가 어떻게 우리를 붙들고 있는가”로 전환됩니다.
Paul
『신앙의 역동성』 · 『조직신학』 I
종교 언어가 상징이라면 그것은 단지 주관적 비유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궁극적 실재에 참여합니까?
상징은 임의로 정한 표지와 다릅니다. 국기가 공동체의 힘에 참여하듯 종교 상징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에 참여하고, 평소 닫혀 있던 현실과 영혼의 차원을 엽니다. 창조주, 아버지, 왕, 사랑이라는 말은 신을 사진처럼 묘사하지 않지만 우리의 존재 관계를 실제로 드러냅니다.
상징은 생겨나고 죽으며 문자화될 때 우상이 됩니다. 그러나 “신은 존재 자체다”라는 말까지 포함해 상징이 아닌 안전한 인간 언어는 없습니다. 상징적이라는 말은 거짓이나 장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언어가 무한한 것을 참되게 가리키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방식입니다. 모든 상징은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향해야 합니다.
저는 전후 독일의 미술과 문학을 해석하면서 상징이 단순한 교리의 삽화가 아니라 현실의 감추어진 깊이를 열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십자가나 창조 같은 상징은 개인이 임의로 발명해 교체하는 암호가 아니라 공동체의 역사에서 생겨나 인간의 무의식과 존재 이해를 변화시킵니다. 하지만 상징은 자신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것과 동일하지 않으므로 비판과 소멸의 가능성을 품습니다. 상징의 참여를 인정하는 일과 상징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일은 함께 가야 하며, 이 긴장이 종교 언어를 공허한 은유와 문자적 우상화 모두에서 지켜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