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s Interview 01 / Thomas Aquinas

De ente et essentia

사물이 무엇인지 아는 일과 그것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물질적 개체에서 보편 개념, 분리 실체와 하나님에 이르는 『존재자와 본질』의 압축된 형이상학을 해부한다.

Aquinas · Work 01

『존재자와 본질』

아퀴나스의 초기 논고는 ‘존재자’, ‘본질’, ‘존재’를 같은 말처럼 쓰지 않는다. 물질적 실체의 정의에서 출발해 지성이 보편자를 형성하는 방식, 비물질적 실체의 합성, 피조물의 본질과 존재가 맺는 관계를 단계적으로 밝힌다. 짧지만 후기 형이상학의 기본 문법이 응축돼 있다.

형식
형이상학 입문 논고
핵심 개념
ens · essentia · esse
문제의 순서
물질 · 보편 · 지성 · 하나님

Chapters I–II · material substances

존재자와 본질

가장 먼저 파악되는 개념에서 출발해 물질적 실체의 ‘무엇임’에 질료와 형상이 어떻게 함께 포함되는지 살핀다.

Paul

제1장

왜 ‘존재자’와 ‘본질’을 지성이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으로 봅니까?

우리는 어떤 대상을 알 때 먼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있는 것’임을 파악하고, 이어 그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더 복잡한 개념은 이 기본적인 파악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작은 오류도 이후의 논증 전체를 흐리게 만드는 존재자와 본질의 뜻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존재자는 두 방식으로 말해집니다. 하나는 실체와 양, 질, 관계 같은 범주들 안에 놓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명제가 참이라는 뜻입니다. 후자의 의미에서는 결여나 부정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멂이 눈 안에 있다고 참되게 말하지만, 눈멂이 독립된 실체의 본질을 가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질은 첫째 의미의 존재자와 연결됩니다. 그것은 한 사물이 어떤 종과 류에 속하며 무엇으로 정의되는지를 말해 주는 ‘무엇임’입니다. 이 구별은 언어의 모든 명사를 실재하는 사물로 오해하지 않게 하고, 참인 명제를 말하는 것과 사물의 본성을 설명하는 일을 분리합니다.

Paul

제2장

물질적 실체의 본질을 형상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연적 사물은 질료와 형상의 합성체입니다. 형상은 질료를 현실적인 이 종류의 사물로 만들지만, ‘인간’이나 ‘동물’의 정의는 형상만이 아니라 그 형상이 실현되는 신체적 구성까지 포함합니다. 집의 본질을 설계도만으로, 사람의 본질을 영혼만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질료만으로 본질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질료는 형상을 받아 특정 종류의 사물이 될 가능성이며, 형상 없이 그 종을 규정하지 못합니다. 본질은 합성체 바깥에 숨어 있는 제3의 성분이 아니라 질료와 형상이 이루는 전체가 정의 가능한 방식입니다.

이 입장은 플라톤적 이데아를 개별 사물과 완전히 분리된 본질로 보는 독법과, 인간을 몸을 사용하는 영혼으로 축소하는 이원론을 함께 경계합니다. 물질적 실체에서 형상은 중심 원리이지만, 그 실체의 무엇임은 형상을 받은 질료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말할 때 몸은 우연한 용기가 아닙니다.

Paul

제2장 · materia signata

왜 ‘지정된 질료’만 개체화하며, 질료 일반은 본질 안에 포함됩니까?

인간의 정의에는 살과 뼈를 가진 몸이 포함되지만 ‘이 살과 이 뼈’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일정한 크기와 위치 아래 지정된 이 물질이 소크라테스를 다른 인간과 구별합니다. 반면 지정되지 않은 질료, 곧 인간 신체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물질적 조건은 종의 본질에서 제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개체의 본질과 종의 본질은 서로 다른 두 실재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의 무엇임은 인간의 본질에 이 개체의 지정된 물질 조건이 더해져 표현됩니다. ‘인간성’이 지정된 조건을 배제해 정확히 지시한다면 소크라테스의 한 부분처럼 술어가 되지 못하지만, ‘인간’은 전체를 비지정적으로 가리켜 소크라테스에게 술어가 됩니다.

이 세밀한 구별은 보편적 정의가 개별 존재를 지우지 않게 합니다. 학문은 공통 본질을 알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이 사람, 이 나무, 이 동물입니다. 개별성은 보편성에 붙은 결함이 아니라 물질적 실체가 현실에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Chapters II–III · universality

종, 류, 보편

‘동물’, ‘인간’, ‘인간성’이 같은 실재를 서로 다르게 가리키는 방식을 통해 보편자가 사물과 지성 안에서 어떤 지위를 갖는지 묻는다.

Paul

제2장

류와 종은 어떻게 부분이 아니라 개체 전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까?

‘동물’이라는 류는 인간 안의 감각적 부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성적 차이를 아직 명시하지 않은 채 살아 있고 감각하는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성적’이라는 종차도 인간 안의 형상적 조각을 따로 지시하지 않고, 그 전체가 어떤 방식의 생명을 갖는지 더 분명하게 규정합니다.

따라서 류를 질료와, 종차를 형상과 단순히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류와 종차는 실재의 구성 요소를 해부한 명칭이 아니라 동일한 합성체를 덜 규정되게 또는 더 규정되게 이해하는 논리적 방식입니다. ‘동물’은 이성을 배제하지 않고 아직 특정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 가능성을 이성적 생명으로 확정합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술어가 참입니다. 부분이 전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전체를 서로 다른 개념적 정밀도로 표현합니다. 논리의 류·종 구조는 존재론적 구성과 연결되지만 그대로 복제하지 않습니다. 그 둘을 구분해야 개념의 관계를 사물 안의 별도 부품으로 실체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Paul

제3장 · essentia absolute considerata

‘인간성’은 개별 인간과 떨어져 존재하는 별도의 실재입니까?

본질을 그 자체로 고찰하면 인간성에는 소크라테스의 개별성도, 지성 안에서 얻는 보편성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인간성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내용만을 담습니다. 하나인지 여럿인지, 보편인지 개별인지라는 조건은 본질이 실제 사물이나 지성 안에 존재할 때 따라오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성이 플라톤적 형상처럼 개체 밖에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여러 개별 인간 안에 개별화되어 있고, 지성 안에서는 개별 조건을 떠나 여러 사람에게 공통으로 술어가 될 수 있는 개념으로 존재합니다. 공통성은 사물에 근거하지만, 보편자로서의 성격은 지성의 이해 방식에서 성립합니다.

이것은 보편자를 단순한 이름이나 임의의 분류로 축소하지도 않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실제로 같은 인간 본성을 갖기 때문에 지성의 보편 개념은 객관적 근거를 가집니다. 다만 ‘보편적 인간’이라는 별도 개체를 상정하지 않고, 실재의 공통 구조와 지성의 추상 작용을 함께 설명합니다.

Paul

제3장

지성이 개별 조건을 추상하면서도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추상은 개별 사물에서 어떤 내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지, 그 내용이 현실에 없다고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기하학자가 청동 삼각형의 무게를 고려하지 않고 모양을 연구해도 그 삼각형이 무게 없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지성은 소크라테스의 이 살과 이 위치를 제외하고 인간의 본성을 파악합니다.

오류는 분리하여 고찰하는 행위 자체보다, 고찰에서 분리한 것을 실제 존재에서도 분리되어 있다고 단정할 때 생깁니다. 물질적 인간의 본질을 개별 조건 없이 이해할 수 있지만, 인간성이 물질과 개체 밖에 홀로 존재한다고 판단하면 잘못입니다. 추상과 분리의 판단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작용은 학문을 가능하게 합니다. 지성이 오직 한 번뿐인 개별 감각만 붙잡는다면 정의와 논증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보편만 실재한다고 보면 개별 사물의 구체성을 잃습니다. 앎은 개별자에서 출발해 공통 본성을 파악하고, 그 본성이 현실에서 언제나 개별화되어 존재한다는 사실로 돌아옵니다.

Chapters IV–V · separated substances

영혼과 분리 실체

질료가 없는 지성적 존재도 완전히 단순한지 묻는다. 천사와 인간 영혼의 차이를 통해 피조물의 합성이 더 근본적인 층위로 이동한다.

Paul

제4장

천사 같은 분리 실체도 질료와 형상으로 합성되어 있습니까?

저는 모든 피조물이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진다는 보편적 질료형상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성적 실체는 물질 기관 없이 이해하는 작용을 하므로 그 본질 안에 물질적 질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순수한 형상이라는 점에서 물질적 실체와 다릅니다.

그러나 천사가 하나님처럼 절대적으로 단순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천사의 본질은 그가 존재한다는 행위 자체가 아니며, 존재를 받아야만 현실적입니다. 따라서 질료와 형상의 합성은 없더라도 ‘무엇인가’라는 본질과 ‘실제로 있다’는 존재 사이의 합성은 남습니다.

이 구별은 피조성의 의미를 물질성보다 깊게 봅니다. 유한함은 몸을 가졌기 때문에만 생기지 않습니다. 비물질적 지성도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고 원인에게서 제한된 방식으로 받습니다. 하나님과 천사의 차이는 더 정교한 물질의 유무가 아니라 존재를 소유하는 방식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Paul

제4장

질료가 없다면 여러 분리 실체는 무엇으로 서로 구별됩니까?

같은 종의 물질적 개체들은 지정된 질료로 여럿이 됩니다. 그러나 질료가 없는 형상에는 같은 방식의 수적 증식이 없습니다. 각 분리 실체는 서로 다른 지성적 형상의 완전성을 가지며, 이런 관점에서는 한 천사와 다른 천사가 같은 종 안의 두 개체라기보다 각각 다른 종적 등급에 해당합니다.

이 차이를 공간적 위치나 몸의 모양으로 상상하면 안 됩니다. 분리 실체의 차이는 존재를 수용하고 지성적으로 표현하는 형식의 차이, 곧 더 보편적이거나 더 제한된 인식 능력의 질서로 설명됩니다. 모두 유한하지만 유한성의 양태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 논증은 경험 과학으로 천사의 수를 증명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비물질적 실체를 인정할 경우 개체화의 원리를 물질 세계와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 귀결입니다. 독자는 논증의 전제를 검토할 수 있지만, 적어도 ‘보이지 않는 작은 물체’라는 상상에서 지성적 실체를 분리해야 합니다.

Paul

제5장 · 인간 영혼

인간 영혼이 존속할 수 있다면 몸은 인간 본질에 부차적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지성적 영혼은 물질 기관에 환원되지 않는 이해 작용 때문에 자체적으로 존속할 수 있지만, 본성상 몸의 형상입니다. 영혼은 몸을 조종하는 완성된 별도 인간이 아닙니다. 완전한 인간의 종적 본질은 영혼과 몸의 합성체에 있으며, 분리된 영혼은 자연적 완전성이 결여된 상태입니다.

인간의 앎도 이를 보여 줍니다. 지성은 보편적 내용을 파악하지만 감각과 상상에서 받은 상 없이는 현세에서 자연스럽게 사고하지 못합니다. 몸은 지성의 감옥이 아니라 인간적 인식과 행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조건입니다. 영혼의 존속을 말한다고 해서 플라톤적 영혼 이원론으로 곧장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부활은 이미 완전한 영혼에 외피를 돌려주는 부가적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 인격의 완전성이 몸을 요구한다는 존재론적 귀결입니다. 이 논고는 부활 교리를 직접 전개하지 않지만, 영혼의 자립성과 몸의 본질적 역할을 함께 붙드는 구조를 제공합니다.

Chapters IV–VI · essence and existence

본질과 존재

사물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과 그것이 있다는 사실의 차이에서 출발해, 존재를 받는 피조물과 존재 자체인 하나님의 차이를 묻는다.

Paul

제4장 · quidditas와 esse

본질을 이해하면서 그 존재를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이 실재적 구별을 증명합니까?

우리는 인간이나 불사조의 무엇임을 이해하면서 그것이 지금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별도로 물을 수 있습니다. 정의의 내용만 분석해서는 그 대상의 현실 존재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 개념적 차이는 본질에 존재가 정의의 한 요소로 포함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단어를 따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물 안의 두 원리를 곧장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논증은 피조물의 본질이 여러 개체와 종에서 제한된 방식으로 실현되며, 스스로 존재의 충분한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인과적 분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존재는 본질에 외부 물건처럼 붙는 성분이 아니라 그 본질을 현실적인 존재자로 만드는 가장 내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본질과 존재의 구별을 두 사물을 조립하는 그림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본질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제한하고, 존재는 그 가능성을 현실화합니다. 피조물은 ‘무엇’과 ‘있음’이 동일하지 않기에 자신의 현실성을 받아야 하며, 이 의존이 실재적 구별의 핵심입니다.

Paul

제4장 · ipsum esse subsistens

왜 본질이 곧 존재인 하나의 제1원인을 요청합니까?

본질과 존재가 다른 것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존재를 받는 원인은 또 다른 받은 존재자들의 무한한 연쇄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존재를 부여하는 궁극적 원인은 존재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이 곧 존립하는 존재 자체여야 합니다.

이 결론에서 하나님은 사물들 가운데 가장 강한 하나가 아닙니다. 어떤 류에 속하는 구성원이라면 류의 공통 본질과 그 개체를 구별하는 원리를 가져야 하지만, 존재 자체는 그런 방식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존재자’라는 종의 최고 사례가 아니라 모든 유한한 존재자가 존재하도록 하는 원인입니다.

그렇다고 이 짧은 논증 하나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종교적 의미를 완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확보되는 것은 피조물의 받은 존재와 제1원인의 비수용적 존재 사이의 형이상학적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지성, 선, 섭리를 말하려면 이후의 더 많은 논증이 필요합니다. 이 논고는 체계의 문을 열지만 체계 전체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Paul

제5–6장 · 참여와 유비

본질이 존재를 제한한다면 피조물과 하나님을 같은 말로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피조물의 존재는 그 본질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한정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나무는 나무로 존재하며 어느 것도 존재의 완전성 전체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본질은 존재를 축소하는 별도 물체가 아니라, 받은 존재 행위가 이 종류의 유한한 실재로 현실화되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존재를 제한하는 별도 본질이 없으므로 존재와 본질이 동일합니다. 따라서 ‘선하다’, ‘지혜롭다’, ‘존재한다’는 말을 하나님과 피조물에게 완전히 같은 뜻으로 적용할 수 없고, 전혀 무관한 뜻으로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피조물의 제한된 완전성은 원인의 완전성을 닮아 참여하므로 유비적 언어가 가능합니다.

유비는 모호한 타협이 아니라 유사성과 더 큰 비유사성을 함께 지키는 규율입니다. 피조물에서 발견한 선을 하나님께 옮길 때 결함과 제한을 제거하고 그 완전성을 원인 안에서 더 높은 방식으로 인정합니다. 이 과정은 하나님을 침묵 속에 지우지 않으면서도, 인간 개념 안에 포획된 거대한 피조물로 만들지 않게 합니다.

Aquinas Archive

정의 가능한 본질에서 받은 존재로

다섯 길, 자연법, 덕과 행복을 다룬 학자 인터뷰로 돌아가면 이 짧은 논고의 존재론이 인식과 행위의 전체 체계로 어떻게 확장되는지 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인터뷰로 돌아가기 다음 저작: 『존재의 용기』

Editor Note

이 문답은 실제 인터뷰가 아니라 『존재자와 본질』의 통상적인 여섯 장 구분을 바탕으로 구성한 편집적 재구성이다. 판본에 따라 장과 문단 구분은 달라질 수 있다. 일인칭 답변은 직접 인용이 아니며, 보편자, 천사의 개체화, 본질과 존재의 실재적 구별에 관한 후대의 논쟁을 단일한 도식으로 환원하지 않았다. 첫 화면 이미지는 사용자가 제공한 시안 자산이며 공개·상업적 사용에는 원작 이미지 권리 확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