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I · Sacra doctrina
신앙과 이성
계시와 철학이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이유, 스콜라적 논쟁 형식의 의미를 묻는다.
Paul
『신학대전』 I, q.1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는 신학은 어떻게 이성적 논증을 수행하는 하나의 학문이 될 수 있습니까?
신학은 스스로 모든 원리를 증명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더 높은 지식인 신의 앎과 계시에 원리를 받아 그로부터 질서 있게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광학이 기하학의 원리를 받아 사용하는 것처럼, 거룩한 가르침은 계시된 원리를 출발점으로 삼는 종속 학문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신앙을 단순한 가설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신학의 확실성은 인간 이성의 밝음보다 원천의 신뢰성에서 옵니다. 신학자는 반론을 피하지 않고 개념을 분명히 하며 모순을 해소해야 합니다. 계시는 이성을 폐기하는 지름길이 아니라 이성이 자기 범위를 알고 더 엄격히 일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물음은 파리 대학에서 신학이 성서 주석, 철학적 논증, 설교를 하나의 질서로 묶어야 했던 상황과 연결됩니다. 도미니코회 수도자로 대학에 들어간 저는 탁발 수도회의 교수 자격 자체가 공격받는 논쟁도 겪었습니다. 『신학대전』은 이미 결론을 아는 전문가를 위한 백과사전이 아니라 초심자가 신, 창조, 인간 행위, 그리스도와 성례를 하나의 목적론적 질서 안에서 배우도록 설계한 미완의 교과서입니다. 신학의 학문성은 계시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고, 받아들인 원리들의 의미와 귀결을 모순 없이 탐구하는 데 있습니다.
Paul
『이교도 대전』 I
철학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앙과 이성이 끝내 모순될 수 없다고 본 근거는 무엇입니까?
자연 이성은 감각 세계에서 출발해 존재, 원인, 인간 행위에 관한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철학적 결론이 계시에 반할 수 없는 이유는 진리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지, 철학자가 성서 구절을 전제로 논증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잘못된 논증은 신앙이 아니라 더 나은 논증으로 고쳐야 합니다.
계시는 이성이 전혀 모르는 진리와, 이성으로 알 수 있지만 소수만 오랜 시간과 오류를 거쳐 알 진리를 함께 전합니다. 삼위일체는 이성만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신의 존재와 일부 속성은 자연 이성으로 논의할 수 있습니다. 구별은 분리가 아니며, 조화는 한쪽의 흡수도 아닙니다.
『이교도 대전』에서 이 구별은 실제 논증의 순서를 이룹니다. 먼저 다양한 독자와 공유할 수 있는 자연 이성으로 신과 창조를 논하고, 뒤이어 삼위일체와 성육신처럼 계시를 통해서만 아는 신비를 다룹니다. 철학의 자율성은 신앙에서 벗어난 중립 지대라는 뜻이 아니라, 고유한 출발점과 증명 방식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참된 이성의 결론과 참된 계시가 충돌한다면 진리 자체가 자기모순에 빠지므로, 실제 충돌은 성서 해석이나 철학적 추론 가운데 어느 한쪽을 다시 검토하라는 신호입니다.
Paul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
당대에 논쟁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왜 깊이 받아들였고, 어디에서 그를 넘어섰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변화, 영혼, 덕을 감각 경험에서 출발해 설명하는 강력한 철학을 제공했습니다. 새로 번역된 그의 저작을 두려움 때문에 금지하거나 곧바로 기독교화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의 논증을 가장 강한 형태로 이해하고, 참인 것은 받아들이며 한계는 정확히 밝혀야 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질료와 형상, 가능태와 현실태, 목적론을 배웠지만 세계의 영원성이나 지성의 단일성 같은 쟁점에서 독립적으로 판단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디오니시우스, 아비센나, 아베로에스와 끊임없이 대화했습니다. 종합은 차이를 지우는 타협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전통의 진리 주장을 논증 안에서 시험하는 작업입니다.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배운 뒤 파리로 돌아왔을 때, 아리스토텔레스 전집과 아랍 철학의 주석은 이미 대학의 지적 언어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확한 번역과 세밀한 주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그의 강한 논리 그대로 읽되, 아베로에스주의적 해석과 그 자신의 주장도 구별하려 했습니다. 세계가 시간적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은 철학만으로 필연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보았지만 창조가 계시된 진리임은 고수했고,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지성만 있다는 주장은 인격적 앎과 책임을 파괴한다고 반박했습니다. 수용은 복종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더 정확히 묻기 위한 철학적 훈련이었습니다.
Paul
『신학대전』의 논제 형식
당신의 글은 왜 늘 가장 강한 반론에서 시작하며, 이 형식은 진리를 찾는 태도와 어떻게 연결됩니까?
문제는 내 결론에 유리한 자료만 모아 해결되지 않습니다. 먼저 가장 설득력 있는 반대 이유와 권위 있는 문장을 제시하고, 그 긴장을 견딘 뒤 핵심 원리를 답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각 반론이 어디에서 옳고 어디에서 구별을 놓쳤는지 개별적으로 응답합니다.
이 형식은 이미 정해진 교리를 장식하는 연극이 아닙니다. 좋은 반론은 답변의 언어를 바꾸고 더 정밀한 구별을 요구합니다. 진리는 반대자를 약하게 만들 때가 아니라 그의 논증을 충분히 강하게 세운 뒤에도 유지될 때 드러납니다. 지적 자비는 상대의 오류를 모호하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묻는 문제에 답하는 일입니다.
이 구조는 중세 대학의 공개 토론인 disputatio를 글로 정제한 것입니다. 학생과 동료가 제기한 반대, 서로 충돌해 보이는 권위, 교수의 결정, 개별 반론에 대한 재답변이 하나의 탐구를 이룹니다. 그래서 『신학대전』의 “나는 답한다”만 떼어 읽으면 결론이 어떤 난점을 해결하려 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제 철학적 여정은 거대한 종합을 단번에 세운 일이 아니라, 수많은 반론 속에서 같은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는 지점을 구별하며 사유의 질서를 만들어 간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