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lar Interview 03 / Being, Reason and Beatitude

Thomas Aquinas

신앙과 이성은 어디에서 만나며,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 존재 논증과 유비, 자연법, 덕과 행복을 12개의 문답으로 읽는다.

Scholar 03

토마스 아퀴나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독교 교리에 단순히 덧붙이지 않았다. 감각에서 시작하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참여하는 창조의 질서 안에서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다시 조직했다.

주요 저작
『신학대전』 · 『이교도 대전』
핵심 문제
존재 · 인과 · 행복
사유의 형식
문제 · 반론 · 응답

Chapter I · Sacra doctrina

신앙과 이성

계시와 철학이 경쟁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이유, 스콜라적 논쟁 형식의 의미를 묻는다.

Paul

『신학대전』 I, q.1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는 신학은 어떻게 이성적 논증을 수행하는 하나의 학문이 될 수 있습니까?

신학은 스스로 모든 원리를 증명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더 높은 지식인 신의 앎과 계시에 원리를 받아 그로부터 질서 있게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광학이 기하학의 원리를 받아 사용하는 것처럼, 거룩한 가르침은 계시된 원리를 출발점으로 삼는 종속 학문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신앙을 단순한 가설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신학의 확실성은 인간 이성의 밝음보다 원천의 신뢰성에서 옵니다. 신학자는 반론을 피하지 않고 개념을 분명히 하며 모순을 해소해야 합니다. 계시는 이성을 폐기하는 지름길이 아니라 이성이 자기 범위를 알고 더 엄격히 일하도록 요구합니다.

이 물음은 파리 대학에서 신학이 성서 주석, 철학적 논증, 설교를 하나의 질서로 묶어야 했던 상황과 연결됩니다. 도미니코회 수도자로 대학에 들어간 저는 탁발 수도회의 교수 자격 자체가 공격받는 논쟁도 겪었습니다. 『신학대전』은 이미 결론을 아는 전문가를 위한 백과사전이 아니라 초심자가 신, 창조, 인간 행위, 그리스도와 성례를 하나의 목적론적 질서 안에서 배우도록 설계한 미완의 교과서입니다. 신학의 학문성은 계시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고, 받아들인 원리들의 의미와 귀결을 모순 없이 탐구하는 데 있습니다.

Paul

『이교도 대전』 I

철학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앙과 이성이 끝내 모순될 수 없다고 본 근거는 무엇입니까?

자연 이성은 감각 세계에서 출발해 존재, 원인, 인간 행위에 관한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철학적 결론이 계시에 반할 수 없는 이유는 진리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지, 철학자가 성서 구절을 전제로 논증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잘못된 논증은 신앙이 아니라 더 나은 논증으로 고쳐야 합니다.

계시는 이성이 전혀 모르는 진리와, 이성으로 알 수 있지만 소수만 오랜 시간과 오류를 거쳐 알 진리를 함께 전합니다. 삼위일체는 이성만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신의 존재와 일부 속성은 자연 이성으로 논의할 수 있습니다. 구별은 분리가 아니며, 조화는 한쪽의 흡수도 아닙니다.

『이교도 대전』에서 이 구별은 실제 논증의 순서를 이룹니다. 먼저 다양한 독자와 공유할 수 있는 자연 이성으로 신과 창조를 논하고, 뒤이어 삼위일체와 성육신처럼 계시를 통해서만 아는 신비를 다룹니다. 철학의 자율성은 신앙에서 벗어난 중립 지대라는 뜻이 아니라, 고유한 출발점과 증명 방식을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참된 이성의 결론과 참된 계시가 충돌한다면 진리 자체가 자기모순에 빠지므로, 실제 충돌은 성서 해석이나 철학적 추론 가운데 어느 한쪽을 다시 검토하라는 신호입니다.

Paul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

당대에 논쟁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왜 깊이 받아들였고, 어디에서 그를 넘어섰습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변화, 영혼, 덕을 감각 경험에서 출발해 설명하는 강력한 철학을 제공했습니다. 새로 번역된 그의 저작을 두려움 때문에 금지하거나 곧바로 기독교화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의 논증을 가장 강한 형태로 이해하고, 참인 것은 받아들이며 한계는 정확히 밝혀야 합니다.

나는 그에게서 질료와 형상, 가능태와 현실태, 목적론을 배웠지만 세계의 영원성이나 지성의 단일성 같은 쟁점에서 독립적으로 판단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 디오니시우스, 아비센나, 아베로에스와 끊임없이 대화했습니다. 종합은 차이를 지우는 타협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전통의 진리 주장을 논증 안에서 시험하는 작업입니다.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배운 뒤 파리로 돌아왔을 때, 아리스토텔레스 전집과 아랍 철학의 주석은 이미 대학의 지적 언어를 바꾸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확한 번역과 세밀한 주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그의 강한 논리 그대로 읽되, 아베로에스주의적 해석과 그 자신의 주장도 구별하려 했습니다. 세계가 시간적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은 철학만으로 필연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보았지만 창조가 계시된 진리임은 고수했고,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지성만 있다는 주장은 인격적 앎과 책임을 파괴한다고 반박했습니다. 수용은 복종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를 더 정확히 묻기 위한 철학적 훈련이었습니다.

Paul

『신학대전』의 논제 형식

당신의 글은 왜 늘 가장 강한 반론에서 시작하며, 이 형식은 진리를 찾는 태도와 어떻게 연결됩니까?

문제는 내 결론에 유리한 자료만 모아 해결되지 않습니다. 먼저 가장 설득력 있는 반대 이유와 권위 있는 문장을 제시하고, 그 긴장을 견딘 뒤 핵심 원리를 답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각 반론이 어디에서 옳고 어디에서 구별을 놓쳤는지 개별적으로 응답합니다.

이 형식은 이미 정해진 교리를 장식하는 연극이 아닙니다. 좋은 반론은 답변의 언어를 바꾸고 더 정밀한 구별을 요구합니다. 진리는 반대자를 약하게 만들 때가 아니라 그의 논증을 충분히 강하게 세운 뒤에도 유지될 때 드러납니다. 지적 자비는 상대의 오류를 모호하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묻는 문제에 답하는 일입니다.

이 구조는 중세 대학의 공개 토론인 disputatio를 글로 정제한 것입니다. 학생과 동료가 제기한 반대, 서로 충돌해 보이는 권위, 교수의 결정, 개별 반론에 대한 재답변이 하나의 탐구를 이룹니다. 그래서 『신학대전』의 “나는 답한다”만 떼어 읽으면 결론이 어떤 난점을 해결하려 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제 철학적 여정은 거대한 종합을 단번에 세운 일이 아니라, 수많은 반론 속에서 같은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는 지점을 구별하며 사유의 질서를 만들어 간 과정입니다.

Chapter II · Esse et essentia

존재와 신

다섯 길을 단순한 최초 사건의 논증으로 축소하지 않고, 존재의 현실성과 의존 구조 안에서 읽는다.

Paul

『신학대전』 I, q.2, a.3

다섯 길은 우주의 최초 순간을 증명하는 논증입니까, 아니면 지금 존재하는 세계의 의존 구조를 밝히는 논증입니까?

다섯 길은 세계의 빈틈에 신을 끼워 넣는 다섯 개의 과학 가설이 아닙니다. 변화, 작용인, 가능성과 필연, 완전성의 등급, 목적을 향한 자연의 질서에서 출발해 지금 존재하고 작용하는 것들이 스스로 충분한 근거가 아님을 보입니다. 특히 원인 연쇄는 먼 과거의 첫 사건보다 현재의 의존 질서를 가리킵니다.

각 길의 마지막에 “이것을 모두가 신이라 부른다”고 하지만 논증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첫 원인이 물체가 아니며 단순하고 완전하며 지성적이라는 점은 뒤의 긴 논의로 밝혀야 합니다. 다섯 길을 한 문단의 만능 증명처럼 사용하면, 그것이 전제하는 가능태와 현실태의 형이상학을 잃게 됩니다.

이 논증들을 제 사유 전체의 출발점으로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신학대전』은 이미 신앙의 관점에서 신을 탐구하지만, 신의 존재가 우리에게 자명하지 않으므로 감각 가능한 결과에서 원인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무한 소급을 거부하는 연쇄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과거로 이어지는 계열보다, 막대기가 손의 힘으로 지금 돌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본질적 의존을 가리킵니다. 다섯 길은 성서의 인격적 신을 한 번에 증명하지 않고, 변화와 질서가 성립하려면 현실태와 원인의 궁극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형이상학적 문을 엽니다.

Paul

『존재자와 본질』

본질과 존재의 구별은 유한한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창조를 어떻게 새롭게 설명합니까?

어떤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도 그것이 실제로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불사조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지만 존재를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유한한 존재자에게 본질은 존재를 받아 제한하는 원리이며, 그 사물은 자기 본질만으로 존재를 필연적으로 갖지 않습니다.

신에게는 이 구별이 없습니다. 신은 존재를 가진 한 존재자가 아니라 본질 자체가 존재하는 분, 자존하는 존재 자체입니다. 이 말은 ‘존재’라는 가장 큰 종류에 신을 넣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에 참여하며, 신은 그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창조는 사물에 처음 운동을 준 사건보다 더 근본적인 존재 의존입니다.

이 구별은 젊은 시절의 『존재자와 본질』에서 이미 핵심 문제로 등장했습니다. 저는 아비센나에게서 본질을 존재 여부와 구별해 고찰하는 통찰을 배웠지만, 그것을 창조와 참여의 형이상학 안에서 다시 구성했습니다. 돌과 인간과 천사는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지면서 모두 존재를 받아 현실이 되며, 어느 것도 자기 힘으로 “있음”을 보유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조는 아주 오래전 한 번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사물이 매 순간 자기 본질을 넘어 존재를 받는 근원적 관계입니다. 세계가 시간적으로 영원하다고 가정해도 이 존재론적 의존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Paul

『신학대전』 I, qq.3–11

신의 단순성은 신을 빈 추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신이 단순하다는 말은 생각이 단순하거나 내용이 빈약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 안에는 질료와 형상, 본질과 존재, 속성과 주체의 합성이 없습니다. 합성된 것은 부분과 결합 원인에 의존하지만, 모든 존재의 첫 원인은 그런 의존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교리는 신을 하나의 최고 사물로 상상하는 습관을 끊습니다. 지혜롭고 선하다는 속성도 신에게 덧붙은 성질이 아니라 하나인 신적 존재를 인간 지성이 여러 관점에서 말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신에 관한 언어는 필요하면서도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단순성은 신을 빈 추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범주로 포획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사유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 개념과 디오니시우스의 부정 신학이 함께 작용합니다. 피조물의 풍요는 서로 다른 부분과 능력이 결합해 생기지만, 신의 완전성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전혀 갖지 않는 순수 현실태이므로 분할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에게 생명, 지혜, 선을 각각 말하는 것은 신 안에 세 성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피조물이 하나의 무한한 완전성을 여러 제한된 방식으로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단순성은 내용의 빈곤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완전성이 분열 없이 근원적으로 하나라는 주장입니다.

Paul

『신학대전』 I, q.13

인간의 유한한 언어로 신에 관해 참되게 말하면서도 신을 하나의 피조물처럼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선하다’가 신과 인간에게 완전히 같은 뜻이라면 신을 피조물의 한 사례로 만들고, 전혀 다른 뜻이라면 우리는 신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유비적 언어는 이 두 극단을 피합니다. 피조물의 선은 신의 선을 닮아 참여하지만, 같은 방식과 크기로 소유하지 않습니다.

유비는 모호함을 감추는 장치가 아닙니다. 효과가 원인을 닮는다는 창조의 관계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완전성에서 출발해 결함을 부정하고 더 높은 방식으로 신에게 돌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개념이 신의 본질을 포괄하지는 못합니다. 참되게 말할 수 있다는 것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므로 신학의 언어는 인과, 부정, 탁월성의 세 운동을 거칩니다. 피조물의 선과 지혜가 어떤 원인에서 왔음을 긍정하고, 그 완전성에 붙은 유한성과 결함을 부정한 뒤, 그것이 신 안에 더 높은 방식으로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라 본질과 존재가 다른 피조물이 존재 자체인 신에게 참여한다는 구조에 근거합니다. 침묵만이 경건하다고 말하면 계시와 창조가 주는 앎을 버리게 되고, 우리 개념을 문자적으로 절대화하면 신을 세계 안의 한 대상으로 축소하게 됩니다. 유비는 그 두 오류 사이에서 책임 있게 말하는 규율입니다.

Chapter III · Lex et beatitudo

자연법과 행복

도덕을 규칙 목록이 아니라 인간의 목적, 습관, 공동선과 은총의 질서 안에서 이해한다.

Paul

『신학대전』 I–II, qq.90–94

자연법은 고정된 도덕 명령의 목록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목적을 숙고하는 실천 이성의 질서입니까?

자연법은 생물학적 충동을 그대로 도덕 명령으로 옮기는 일이 아닙니다. 이성적 피조물이 영원법에 참여하여 인간의 선을 인식하고 행위를 명령하는 방식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원리는 선을 행하고 추구하며 악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고, 생명·가정·진리·사회적 삶에 대한 성향에서 더 구체적 원리가 나옵니다.

적용에는 실천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일반 원리가 분명해도 복잡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경험과 판단을 요구하며, 인간법은 공동체의 조건에 맞게 원리를 구체화합니다. 그래서 모든 법률이 자연법의 문장 그대로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 정당한 법은 공동선을 위해 이성이 공포한 질서여야 하며, 부당한 법은 법의 힘을 훼손합니다.

『신학대전』에서 자연법은 영원법, 인간법, 신법과 분리된 네 개의 경쟁 체계가 아닙니다. 신의 지혜가 모든 피조물을 목적에 맞게 이끄는 영원법에 이성적 존재가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이 자연법이고, 입법자는 이를 공동체의 구체적 규범으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세부 결론은 상황과 악한 습관 때문에 흐려질 수 있으며, 모든 도덕 판단이 하나의 추상 원리에서 기계처럼 연역되지는 않습니다. 법론의 중심에는 명령 목록보다 인간이 어떤 선을 향하도록 창조되었는가라는 목적론과, 그 선을 실제 상황에서 분별하는 실천적 지혜가 있습니다.

Paul

『신학대전』 I–II, qq.1–5

인간의 완전한 행복이 신의 지복직관에 있다면 현세의 우정·덕·관조는 어떤 가치를 가집니까?

모든 의도적 행위는 어떤 선을 향하며, 부분적 목적들은 궁극적 목적을 전제합니다. 부, 명예, 권력, 쾌락은 실제 선을 제공하지만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완전한 행복은 보편적 선인 신을 직접 아는 지복직관에 있습니다.

현세에서도 불완전한 행복은 가능합니다. 덕 있는 활동, 우정, 관조, 충분한 외적 조건은 좋은 삶을 이룹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 능력만으로 신의 본질을 직접 보는 초자연적 목적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은총은 인간 본성을 폐기하지 않고 그 능력을 넘어 완성합니다. 자연적 선과 영원한 행복을 경쟁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지평을 바꾸었습니다.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 이성에 따른 덕 있는 삶이라는 통찰은 옳지만, 보편적 진리를 향한 지성의 욕망은 어떤 유한한 대상에서도 완전히 쉬지 않습니다. 계시는 그 욕망의 완성이 신의 본질을 직접 보는 지복직관이라고 가르치며, 이는 창조된 능력이 스스로 획득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그렇다고 현세의 우정과 정치적 평화가 단순한 수단으로 격하되지는 않습니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하므로, 좋은 인간적 삶은 최종 행복의 경쟁자가 아니라 그것을 예비하고 부분적으로 반영합니다.

Paul

『신학대전』 I–II · II–II

덕은 규칙을 반복해서 지키는 습관입니까, 아니면 인간의 욕망과 이성을 새롭게 형성하는 능력입니까?

덕은 좋은 행동을 우연히 한 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욕망을 안정적으로 좋은 행위에 준비시키는 습관입니다. 실천적 지혜는 상황에서 적절한 수단을 판단하고, 정의는 타인에게 마땅한 것을 주며, 용기와 절제는 감정을 없애지 않고 이성의 질서 안에 둡니다.

신앙, 희망, 사랑이라는 신학적 덕은 인간 훈련만으로 생기는 습관이 아니라 신을 직접 목적으로 삼도록 주어집니다. 특히 사랑은 다른 덕들의 형식이 되어 행위를 궁극적 목적에 연결합니다. 규칙 준수는 필요하지만, 선한 사람이란 외부 명령에 억지로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것을 올바른 이유와 방식으로 기쁘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저는 획득되는 덕과 주입되는 덕을 구별합니다. 반복과 교육은 감정과 판단을 이성적 중용에 익숙하게 만들지만, 인간을 초자연적 목적으로 향하게 하는 신앙·희망·사랑은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두 질서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른 덕을 폐기하지 않고 행위가 신과 이웃의 선을 향하도록 형성하며, 실천적 지혜는 보편 규칙을 이 구체적 상황에서 어떻게 행할지 판단합니다. 윤리의 핵심은 규칙 위반을 사후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을 보고 즐거워하며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가에 있습니다.

Paul

『군주의 통치』 · 『신학대전』 II–II

정치 공동체가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면, 세속 권력과 교회의 역할과 한계는 어디에서 갈립니까?

인간은 혼자 자급하는 존재가 아니라 언어와 협업을 통해 살아가는 정치적 동물입니다. 정치 공동체의 목적은 통치자의 사익이나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덕 있게 살 수 있는 공동선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공동선은 개인 몫으로 나누면 사라지는 재산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질서와 평화입니다.

정치는 영적 행복을 직접 생산할 수 없고 교회도 모든 시민적 판단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인간법은 모든 악을 한꺼번에 금지하면 더 큰 해를 낳을 수 있으므로 점진성과 현실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최선의 통치는 도덕적 목적을 가지되 유한한 제도임을 아는 통치입니다. 권위는 공동선을 섬길 때 정당성을 얻습니다.

『군주의 통치』와 『신학대전』의 정치적 논의는 현대적 정교분리의 청사진을 그대로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본성상 정치적 존재이고 시민 공동체가 그 자체의 참된 선을 가진다는 점에서, 정치를 단순히 타락의 벌이나 교회의 행정 부서로 보지 않습니다. 세속 통치는 평화와 정의, 덕 있는 삶의 외적 조건을 마련하지만 초자연적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영적 권위도 모든 정책 판단을 대신할 전문성을 갖지 않습니다. 공동선의 위계는 권력의 무제한을 정당화하기보다 각 권위가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넘어설 때 비판할 기준을 제공합니다.

Inquiry Lab · Scholar 03

존재론을 앎·행위·정치의 구체적 판단으로 확장하기

지성과 인식, 섭리와 제2원인, 감정과 덕, 부당한 법과 저항을 연결해 다섯 길 중심의 독해를 인간의 전체적인 삶으로 넓힌다.

아퀴나스 심화 질문 만들기

Works Interview 02

『법론』

이성, 공동선, 권위와 공포에서 자연법과 인간법, 부당한 법, 관습과 법 개정의 문제까지 12개의 심층 문답으로 해명한다.

『법론』 인터뷰 읽기

Scholar Archive

다음 목소리

중세의 존재 질서는 현대의 불안과 무의미 앞에서 다시 질문된다. 폴 틸리히는 존재론과 실존의 언어로 신학을 재구성한다.

폴 틸리히 인터뷰 읽기전체 학자 보기

Editor Note

이 문답은 실제 인터뷰가 아니라 『신학대전』, 『이교도 대전』, 『존재자와 본질』,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와 주요 연구를 바탕으로 구성한 편집적 재구성이다. 일인칭 답변은 직접 인용이 아니며, 다섯 길을 현대 과학의 최초 사건 논증으로 축소하거나 자연법을 고정된 규칙 목록으로 단순화하지 않았다. 첫 화면 이미지는 사용자가 제공한 시안 자산이며 공개·상업적 사용에는 원작 이미지 권리 확인이 필요하다.